강화도조약의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국
대한 개인적 시선
-서구인들이 본 명성황후
똑똑하고 지적이고 친절한 명성황후의 첫 인상
1) 모든 점에서 훌륭한 여성이라고 서구인들은 그를 칭찬했다. 지성있고, 교육받았고 성격이 강해 굽힐 줄 모르고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 대원군이 감당하기 어려운 적수라고 외교관들은 그녀를 칭찬했다.
조선 .중국 양국 간의 전통적 해금 , 조공관계를 근대 외교, 통상관계의 틀 속에서 재조정할 필요가 생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때마침 조선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한다. 청은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이홍장의 북양육군 3000명을 서울과 근교에 파견, 점령하고 곧 이어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간다. 이
개화당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견문한 내용을 고종에게 보고하고 여러 가지개화정책을 건의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의 건의로 신식군사기술을 습득하기 위한 유학생 50여명이 일본에 보내졌으며, 이밖에 국 박문국, 전환국, 기기국, 우정국 등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화당의 활약은
전쟁ꡑ의 백주년을 기념하여 수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한 집중적인 논의가 있어 왔다. 그 가운데 한국역사연구회가 다년간에 걸쳐 근대사연구의 신진 기예의 역량을 집중적으로 동원하여 편찬한『1894년농민전쟁』1˜5(역사비평사, 1988˜1995)는 농민전쟁의 배경?전개?귀결을 경제?정치?사상 등
일본은 배상금과 공사관 수비병의 주둔권을 획득
- 청나라의 세력 강화 및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 청나라 또한 일본과 동시에 군대를 파병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해 버리고 고종의 복귀를 도왔다. 동시에 청은 이에 대한 배상으로 여러 가지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즉,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군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 법으로 처리되었다.
(2)- 2. 성환과 평양의 전투
친일 내각으로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을 부여받은 오오시마 요시마사는 약 4,000명의 일본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
조선침략에 대한 고종의 대응이 일제의 조선 통치에 어느 정도의 위협이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1. 고종(高宗)의 생애
고종은 조선의 제26대 왕으로서 실질적으로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다. 1852년에 태어나서 1919년에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여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갈등
일본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명치유신 이후 급속히 발전하고 있었던 근대적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정책에는 당연히 근대적 문물에 대한 지식 이 있는 인사들이 필요하였으므로 개화파들은 자연히 정부안의 여러 직책에 임용되기에 이르렀다.
개화파들은 개혁사업을 통해
일본이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었으며, 중국은 1840년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굴복한 후에 1856년 애로 호 사건의 결과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영국과 프랑스에게 굴복하였고, 러시아는 연해주를 확보한 후 두만강을 넘어 한국으로 침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